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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山山脈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by 월간김현청 posted May 0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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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山山脈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1. 서라벌에서 永同으로
영산김씨(永山金氏)의 뿌리를 알려면 먼저 대보공(大輔公) 휘(諱) 알지(閼智)의 탄생 설화로부터 시작된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나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제4대 석탈해왕 9년(中國漢明帝八年)에 김알지(金閼智)란, 금궤 속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김씨(金氏)라 했고 아기란 뜻에서 알지(閼智)라 이름했고 시림(始林)의 이름을 계림(鷄林)이라 바꾸니 계림은 곧 신라(新羅)의 국호(國號)가 되었다.
  알지는 성장하여 태자인 강조의 딸과 결혼하니 마정부인(摩貞夫人)이며 알지는 대보에서 세조왕으로 추존이 되고 7세손 미추왕부터 38왕을 김씨가 했으며 박씨가 10왕이고 석씨가 8왕이다. 영산김씨는 45대 신무왕의 후예이다.  

  신라(新羅) 사십오대(대보공 閼智로 부터 22세손) 신무왕(神武王)의 휘(諱)는 우징(祐徵)이며, 서기 839년 4월에 즉위 했다.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증손이고 상대등(上大等) 휘 균정(均貞)의 아들이며 희강대왕(僖康大王)의 종제(從第)이다. 네 아들을 두시니 장자 휘 경응(慶膺)이 46대 문성왕(文聖王 -善金氏)이요, 차자 휘 영광(英光)은 康津金氏(道光金氏,延安金氏) 선계(先系)이며, 3자 휘 흥광(興光)은 평장사(平章事)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광산김씨(光山金氏) 선계이고, 4자 휘 익광(益光-23세손)은 태자첨사(太子詹事)로 영산김씨(永山金氏) 선계(先系)이다.

  반도( 叛徒)의 출몰이 잦았던 신라 신무왕(神武王)때 이를 우려(憂慮)한 끝에 왕의 측근자를 지방의 통독(統督)으로 파견하여 지방의 정세와 인심의 동향을 살피게 하였는데 영산(永山-永同)지방에 파견(派遣)된 왕자가 신무대왕의 제4자인 익광(益光)이다. 익광은 부왕의 명(命)을 받고 영산지방(현재 영동 지방)을 통독(統督)하다가 서거(逝去)하시니 아들 휘 찬(瓚-24世孫) 손자 정(正-25世孫)이 대대로 세습하여 그 자자 손손이 영산에서 번영(繁榮)하여 오늘에 이르러 영동땅에 세거(世居)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후 고려 400 여년 동안 조정에 출사입공(出仕立功) 해 오던 중 고려 말(高麗末) 중현대부(中顯大夫) 전객시령(典客寺令) 영산군(永山君) 휘(諱) 영이(令貽-45世孫) 선조께서는 국정이 극도로 문란하자 난국을 구하려고 중신들과 힘을 합쳐 온갖 힘을 다 했으나 기울어진 국운이 이씨(李氏)에게로 기울어짐을 한탄하다 두 아들 길원(吉元)과 포(苞)를 앞세우고 세 사위 맞사위-순천인(順天人) 박원룡(朴元龍) 이부시랑(吏部侍郞), 둘째 사위-구례인(求禮人) 장비(張丕) 한성판윤(漢城判尹), 넷째 사위 밀양인(密陽人) 박시용(朴時庸) 대제학(大提學)을 대동(帶同) 대대로 지켜온 고향으로 낙향하여 이곳 기산(箕山) 대암(臺岩-氷玉亭)에서 소일하다 서거(逝去)하시니 난세에 후손에게 미칠 후환이 두려워 묘소에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아 자손들이 실전(失傳)된 묘소를 대신하여 네 옹서(翁壻)가 같이 네 단(壇)을 모시고 해마다 음력 10월 초하루에 네 문중이 시제(時祭-묘사)를 모셔 오다 밀양박씨(密陽朴氏)와 순천박씨(順天朴氏)는 묘를 찾아 이전해 갔고 김,장 양문(兩門)에서 단제(壇祭)를 모시고 있으니, 이 분이 영산김씨(永山金氏) 관조(貫祖)이신 중현대부 전객시령 영산군 김영이(金令貽) 시다.

***영산김씨의 관조(貫祖)이신 김영이(金令貽) 묘소(墓所)로 양가동(陽佳洞) 산 19-1번지 김정승(金政承)골에 후손과 647(2002.5.29현재)년간 상접(相接)을 잊어 오다 고(故) 김동표(金東杓)씨의 노력으로 족보(族譜)에 나타난 지명(伽倻谷-개골-양가동-정승골-서당골)과 주민(영일정씨-정태모씨 외 2명)의 증언을 토대로 찾아 김두성(金斗性-대전)씨가 뜻을 같이하는 몇분의 협조를 얻어 영산김씨(永山金氏) 관조묘(貫祖墓) 앞에 표석(標石-瑞山 金應洙)을 세우고 후손의 못남과 어리석음을 자책하며 영산의 토성으로 영산의 주인이었음을 住民에게 알리고 崇祖하는 爲先事業에 힘 쓸 것을 다짐했다.

***태자첨사 휘 김익광 묘 ***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양가동) 임야 184의 3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김익광 묘(고총)는 65평(215㎡)에 직경 14m, 높이 3.5m 의 방대한 규모이다. 이 묘를 중심으로 사방에 27기의 고총이 있어 영동군에서 고분단지로 알면서도 문화재 자료 경시와 관리 소홀로 26기는 주민이 개인 소유로 지목을 변경하여 농지(과수원)로 이용하고 있는 것을 1987년 2월 19일 영산김씨 김동표(시조-65세손,관조-21세손)씨께서 토지 주인 정도영씨를 설득 65평을 희사 받아 영동군에 영산김씨 중시조 태자첨사 묘로 등록을 마치니 군에서 철책 시설을 하여 보호하게 되어 영산김씨가 해마다 벌초와 참배를 하고 봉안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내부는 수차 도굴)

☞*참고로 영동문화원에서 발행한 ‘내고장 전통 가꾸기“ 영동군 “향토사료지”를 소개하면☟    1982.2.10일자  
“조선보물 고적조사자료”에 동북방 약 300칸 서북방 약 50칸 내지200칸, 임야전내 2개 소수 25기, 내 직경 약 10칸 성토붕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적석층(돌로 쌓은 무덤의 위에 흙을 쌓은 것)으로 외부에서 보면 봉토분으로 보이는데 봉문이 원형 보존되어 있다. 신라 제45대 신무왕(839년)의 넷째 아들 김익광의 묘라고 전해오고 있다. 아무튼 신라조의 유력자의 묘임엔 틀림이 없다.」
  *영산김씨 족보 庚辰譜에 서기 809년에 생하여 서기872년에 졸하여 묘가 영산(영동) 가야곡(伽倻谷)동에 있다 했으니  가야곡동은 지금의 영동읍 양가동으로 왕능(왕자)의 규모로는 상기한 현존 유적으로 단정하는 바이며 필자가 추측컨대 농지로 변경된 26기도 김익광 이후 그 후손들의 집단 묘지였음이 틀림 없으리라 본다.


2. 永山金氏 貫祖 壇所의 由來

忠淸北道 永同郡 楊江面 藍田里 山 661番地에 자리잡고 있는 氷玉亭은 650 餘 星霜의 歷史을 지닌 곳이다.
氷玉이라 함은 氷淸玉潤之義에서 引用된 말이니 中國 晋나라 故事에 丈人되는 樂廣과 婿郞 衛介와의 翁서之情을 表現하는 代名詞다.
고려 말에는 국내사정이 복잡 다단하였으니 충열왕을 위시하여 충선 충숙 충목 공민 제왕은 원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여 궁내는 물론 사회풍조가 몽고 일색으로 변모하여 감으로 우리 백의민족의 수천년 지녀온 고유문화는 자취를 감추고 또한 몽고의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내정간섭으로 국세가 쇠퇴하여지고 설상가상으로 모빙사로 하여금 수많은 처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조야의 비정과 원성이 자자했던 것이며 충열 충선 충숙 충혜왕의 4대에 걸친 양위와 重祚는 소아의 유희와 같았고 부자지간의 불화는 구수에 비할 만 하였다.
이러한 왕권 쟁탈로 정치 기능은 마비되고 왕실의 기강은 극도로 紊亂하였으며 일반 사회 또한 윤리 도덕의 부폐가 극에 달하고 간신의 내홍은 내란을 유발케하니 망국지운을 바로 잡을 수 없었다.
이러한 난국을 맞이했던 典客寺令 永山君 金令貽는 사양길로 접어드는 국운을 痛歎한 나머지 맏사위 吏部侍朗 順天朴公 元龍과 둘째 사위 漢城判尹 求禮張公 丕와 셋째 사위 大提學 密陽朴公 時庸과 더불어 벼슬을 버리고 영산(영동의 옛 이름)으로 낙향하여 천석이 절승한 이곳에서 갈건야복으로 소요자락하고 인재양성과 강학에 진력하며 戀君憂國하는 마음으로 매일같이 북향 4배로 여생을 보내니 세인이 말하기를 ‘德星이 箕山하에 모였다 하더라’라고 하였다한다. 金令貽는 서라벌 大輔公 金閼智의 후손으로 新羅 45代 神武王 第4子 金益光(묘소-영동읍 양가동 아파트 뒤)으로부터 역대 조상들이 영동을 世居地로 살았던 곳이며 공이 出生한 故鄕임으로 세 사위를 데리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4옹서는 이곳 산을 기산이라 부르고 시냇물을 령수라 명명하였으니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중국 태평 세대에 堯 人君은 천하를 許由에게 讓位하려 했었다. 그 말을 들은 허유는 반가와 하기는 고사하고 더러운 말을 귀로 들었다하여 영수에 귀를 씻었다. 그때 마침 巢父는 소를 몰고 물을 먹이러 왔다가 許由가 귀를 씻고 있기로 그 사연을 듣고 더러운 말을 듣고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어찌 소에겐들 먹일 소냐 하고 딴 곳으로 가서 물을 먹였다는 것이며 그후 이로 인하여 허유와 巢父는 의지가 상합 하여 하남성 등봉현 동남쪽 기산으로 깊숙히 은거하고 속세를 버렸던 것이다.
4옹서는 자신들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함을 허유와 소부에 비유하여 그와 같은 산의 이름과 시냇물을 이름한 것이다. 진나라 고사에 樂廣과 衛介의 氷淸玉潤之 翁서의 情을 彷佛햇던 4옹서는 허유와 소부의 崇高無涯하고 高邁한 정신과 氷淸玉潤之美風을 흠모하고 그들이 행한 바를 본받아 백설같이 깨끗한 생애를 보냈으니 삼천리 강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미담이요 동서고금에도 희귀한 일이다. 애국지사이며 큰 선비였던 김영이와 세 사위는 망국의 한을 품고 서거하셨으니 실로 가상한 일이며 통탄할 일이다.
그 후 4성 후손들은 묘를 실전하여 살아생전에 즐겨 노시던 이곳 臺巖에 4위의 단을 모으고 淸潤壇이라하고 정자를 세워 氷玉亭이라 이름함은 氷淸玉潤에서 인용한 것이니 그 뜻이 깊고 깊은 것이다. 세월이 흘러 순천박씨와 밀양박씨는 묘를 찾아 이단 하여 감으로 영산김씨와 구례장씨만이 이곳을 수호하고 있으나 4성자는 600 여년이 흐르도록 조상들의 情誼를 이어 받아 형제지간 같이 지내고 있으니 앞으로도 세상 다 하도록 계승하리라 믿는다.
서기 1977년 1월 17일 4성 자손들은 돈목함을 굳게 다짐하는 뜻에서 빙옥회를 구성 조직하고 鳩財를 모아 조경 단청하고 자연석 비를 세워 萬世敦睦이라 대서 각자 한 金石之文을 후세에 남기니 조상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단결의 標徵으로 삼았다.
이와 같이 뜻 깊은 이 곳은 정신문화 발상지로 길이 빛날 것이다.      
*2001년 10월에 홍살문을 세웠고 담장 공사를 했다(군)
*2005년 4월 14일에 빙옥회(영산김문 밀양박문 순천박문 구래장문)의 결의에 의하여 「四翁婿淸潤遺墟碑」를 건립 준공했다.                   貫祖의 壇碑


3. 유적지                  

(1)빙옥정(氷玉亭)                        
■ 구분 : 향토문화재(14호)
■ 지정일 : 1996년 5월
■ 시대 : 조선 영조 40년 창건
고려말의 전객령 김영이가 벼슬을 버리고 사위 장판윤공과 함께 고향에 내려와 이곳 기산에서 수석의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읊으며 여생을 즐겁게 하고 마음가짐을 고결하게 하였던 곳이라 하여 자손들이 그 유지에 1764년 정자를 세우고 빙옥정 이라 하였다.
빙옥이란 뜻은 옛날 중국 고사에 장인 되는 낙광의 집과 사위 집 옥윤과의 정이 수정과 같이 맑고 얼음과 윤기나는 구슬에 비할 수 있기에 빙옥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 정자의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 팔작 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 갈건야복(葛巾野服) : 갈포로 만든 두건과 베옷(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사     는 선비의 의관)
※전객시령(佃客寺令) : 고려 시대의 관직으로 오늘날의 외교부장관과 같음

(2) 풍천당(楓川堂)과 묘소  
■ 시대 : 태종13년(1413)창건, 1976년 중건
■ 소재지 : 영동군 용산면 용산리 45-2번지
■ 규모 : 창건당시 ->정면 4간, 측면 2간 팔작집, 현재 -> 2층 맞배집
풍천당은 영산김씨 문중의 소유로서 정면4간, 측면2간 팔작집으로 조선 태종 13년(1413)에 우찬성 김종경이 창건하였으나 1976년 아깝게도 콘크리트 2층 맞배집으로 건물을 중건했다.

조선 초 정종때 문과에 급제한 우찬성 김종경은 영산김씨 관조이신 영산부원군 김길원의 아드님이시다. 태종 暮年에 堂宇를 짓고 강학하신 곳으로 박연 국당 박흥생 서거정 같은 현인이 이 문하에 출입했다. 贊成公府君께서는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一切 명찰을 외면하는 한편 산수간에 소요하며 일당을 구성하여 楓林이 繞崖하고 川流가 抱村이란 말에서 雅號를 楓川堂이라 命名하고 항상 사림과 더불어 시서를 강론하여 의리를 궁구하는 동시에 鄕約을 정하고 善行者에게는 表彰을,行惡者에게는 懲罰을 가하니 풍속이 순화하여 일대성사를 이루었다. 얼마 후에 병화로 소실되어 67년 간이나 중건하자는 종의 끝에 정조 신축년 서기 1781년에 구기에다 중건을 이룩하니 4간 2열 원주 2층의 건물이 준공됨에 유림들의 시론과 경서강의가 이어졌고 향음례까지 겸하여 흥학의 열의가 나날이 왕성하여 가던중 경술국치를 당하자 頹落이 심하고 풍우에 시달려 손실된 것을 보고 중수에 고민하던 중 동옥 재인 동표 동방 제족이 중수 방안을 제시하여 1976년 10월 7일 양식으로 준공을 했다. 쓰러져 가는 조상의 유물을 안타까워 중건한 것이 지금에 와서 전화위복이 아니라 전화위화가 되었으니 더욱 마음 상한다. 당시의 후손들이 좀더 총명했더라면 원형을 유지했어야 하는 건데, 도 지정 문화재 신청을 해도 원형 보존이 없어 안 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3) 풍계사(楓溪祠)                      
■ 시대 : 태종31년(1413) 창건 1996년 복원
■ 소재지 : 영동군 용산면 용산리 45-2
영산부원군 김길원 그의 아들 김종경 그리고 괴애 김수온 등을 배향하는 사당을 풍천당 옆에 1996年 복원하였다.  

풍계사는 순조 기묘 1819년에 창건한 사우로서 찬성공부군과 괴애 문평공부군을 모시고 春享秋祀를 보행하며 유덕을 추모해 왔는데 불행히도 대원군의 書院毁撤令으로 부득기 撤廢되었다. 해방후 풍계사 복원의 종론과 승유제 감모제의 철폐 사정에 이르자 양제에서 모시던 제향을 풍계사를 복원하고 여기서 봉사하자는 종의에 따라 1995년 3월 초에 기공하여 동년 10월 중순에 준공을 보았다. 1995년 가을부터 복원된 풍계사에서 2세조 부원군부군 3세조 찬성공 부군 4세조 영상공 부군 5세조 문평공부군의 4대를 봉사한다.
2002년 3월에 군의 보조를 3000만원 받아 단청을했다

(4) 풍천당․풍계사 사적비          
■ 소재지 : 영동군 용산면 용산리 45의2
1413年 (조선 태종 13년)에 우찬성 김종경이 창건한 서당으로 만년에 그가 학문을 가르치던 풍천당을 1976년 영산김씨 종중에서 콘크리트 2층 건물로 중건했으며 그 경내에 풍계사를 1996년에 중건하여 그곳에 문중 대표 청산(廳山) 김동대(金東大)씨가 사적기문을 지었다.  

(5)영산부원군 김길원 묘소  
■ 시대 : 고려말(1328~1396)
■ 소재지 : 영동군 영동읍 산이리 분통골
본관은 永山이며 홍건적난에 공민왕을 복주(지금의 안동)로 피난시킨 공으로 영산부원군으로 봉해졌다. 68세로 돌아가셨다.  

(6) 문화재명 김수온 묘소  
위치 ; 영동군 용산면 한곡리 산 18-1    
지정종별 ; 지방기념물 제76호  
개 요  
이 무덤에는 김수온(1409~1481) 선생이 안장되어 있다.
묘비와 장명등 및 문인석이 있다.
김수온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자는 문량(文良), 호는 괴애(乖崖) 또는 식우(拭疣)이며 본관은 영동이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세종 23년(1441)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에서 {치평요람}과 {의방유취}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불경 등의 국역 사업에 공이 컸으며 벼슬은 여러 요직을 거쳐 성종 2년(1471)에 좌리공신 4등에 책록되었고, 영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 부조묘(不祧廟)가 보은군 보은읍 지산리에 있다.(보은군 지방 문화재)


4. 인물

(1) 관조 이전의 선계 인물

   1)대보공 김알지 시조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제4대 석탈해왕 9년 을축(중국 한명제 영평8년) 어느 봄날 밤에 탈해왕이 궁정을 거닐고 있을 때 금성 서쪽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와서 괴이하게 생각한 왕은 날이 밝기를 기다려 고공을 시켜서 가서 살펴 보라 했다. 고공이 시림에 가보니 이상하게도 금궤짝 하나가 시림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나무 밑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한다. 고공은 급히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사람을 시켜 금궤 짝을 가져와 열게 하였다. 궤 속에서는 이목구비가 번듯한 미모의 남자 아기가 들어 있었다. 왕은 놀랍고 기뻐서 좌우 대신들을 돌아보며 이는 하늘이 내린 나의 아들임에 틀림 없다하고 기르기로 하고 거두었다. 아기는 자라며 머리가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아름을 알지라 고 했는데 알지 란 "아기"란 뜻이고 금궤 속에서 나왔기로 성을 김씨라 했으며 시림의 이름을 계림이라 바꾸고 국호로 하였다.
알지는 자라서 태자인 강조의 딸과 결혼을 했으니 이분이 마정부인이며 알지는 대보에서 태조왕으로 추존이 되고 7세손 미추왕부터 김씨가 왕정을 맡았다.
한국의 김씨는 김알지를 시조로하는 신라김씨와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의 두 갈래이다. 신라의 왕은 박씨가 10왕이고, 석씨가 8왕이며 김씨가 38왕을 했다.

  2) 미추왕
新羅13代王 味鄒王(味鄒尼師今)은 西記262年에 王位에 올랐다.王의 先祖는 金閼智로서 13代 沾解王(昔氏)이 아들이 없어 味鄒尼師今이 뒤를 이으니 金氏로서 처음 王이 되었다.在位 23年 西記 284年10月에 돌아가시어(慶州市 皇南洞-大陵-竹長陵) 다시 昔氏(14代-儒禮王)가 王位에 올랐고, 다시 17代 奈勿王이 王位에 올라 金氏가 52代 孝公王까지 하다 53 54 55代를 朴氏가 이어 받더니 新羅의 社織을 滅亡의 弱國으로 만둘고 감당을 못하여 56代 敬順王(金氏)에게 떠넘기니 華麗하고 燦爛했던 祖上의 紫翠를 꿈 인양 생각하고 견디고 견디었으나 헤어날 길이 없어 1000年 社稷을 高麗에 넘기는 悲運을 우리 金氏가 맡았다고 본다.

  3) 신라 45대 신무왕
신라45대 신무왕(우징)은 신라 하반기에 왕권 다툼이 극에 이르렀을 때 43대  희강왕을 몰아내기 위하여 부친 균정과 김양의 모의에 가담했으나 김명에게 균정이 죽고 실패했다. 청해진으로 피신중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44대왕이 된 민애왕(김명)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혼란한 정국을 바로 잡기 위한 최선책이며 강자만이 생존한다는 교훈이라 하겠다.
신무왕은 아들 4형제 중 맏아들 慶膺에게 물려주니 46대 文聖王이고 나머지 아들은 왕권 다툼에 연유되어 희생될까 염려되어 안전지역을 택하여 둘째 영광은(도광김씨 연안김씨 관조)도광으로 세째 흥광은(광산김씨 관조)광산으로 네째 益光은(永山金氏 中始祖) 永山(지금 永同)에 살게 하였다. 문성왕은 17년 집권하고 삼촌(47대 헌안왕)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신무왕의 6세 직손이다.

  4) 태자첨사 김익광
新羅 四十五代(大輔公 閼智로 부터 22世孫) 神武王의 諱는 祐徵이며, 西紀 839年 4月에 卽位 했다. 元聖大王의 曾孫이고 上大等 諱 均貞의 아들이며 僖康大王의 從第이다.生 四子하니 長子 諱 慶膺이 四十六代 文聖王(善山金氏)이요, 次子 諱 英光은 康津金氏(道光金氏) 先系이며, 三子 諱 興光은 平章事 光山府院君으로 光山金氏 先系이고, 四子 諱 益光(23世孫)은 太子詹事로 永山金氏 先系이다. 叛徒의 出沒이 잦았던 新羅 神武王때 이를 憂慮한 끝에 王의 側近者를 地方의 統督으로 派遣하여 地方의 情勢와 人心의 動向을 살피게 하였는데 永山(永同)地方에 派遣된 王子가 神武大王의 第四子인 益光이다. 益光은 父王의 命을 받고 永山地方(現在 永同 地方)을 通督하다가 逝去하니 아들 諱 瓚(24世孫)孫子 正(25世孫)..........高麗末 中顯大夫 典客寺令 永山君 令貽(45世孫)까지 脈을 이어 永山金氏의 貫祖로 자리 잡았다.
***文科에 올라 太子詹事試閤門祗侯에 이르렀다. 또는 太子詹事光祿大夫檢校輕車令知紫金魯袋翰林院事라 한다. 西紀 809年 己丑에 生하여 西紀872年 壬辰에 逝去했다. 王命을 받아 始居 永同했다. 庚辰譜부터 壬寅譜까지의 記錄이 墓가 永同 伽倻谷洞에 있다고 했으니 伽倻洞은 永同邑 陽佳洞이다. 後麓 에 尨大한 墓가 자리잡고 있으니 直經이 14米나 된다. 이 墓가 益光의 墓가 아닌가 한다. (丙子譜-1996年) *王子이니 王陵과 비슷한 陵은 이것 하나 뿐이니 益光의 墓가 틀림없다.(66世孫 雲谷 潤鎬)

  5) 김찬
부친 김익광을 따라 영산(영동)에서 거주하니 서기 829년에 출생하여 900년에 하세하니 선영하 병좌로 장례를 모시었다. 조부는 신무왕이며 헌안왕은 종조부가 된다. 관직이 太子詹(첨)事 監門長史에 이르렀다.

  6) 김인영
고려말 충열왕 원년 서기 1275년에 출생하여 충혜왕
원년 서기 1331년에 하세 하니 향년 57세였다.
벼슬이 近侍都校署承에 이르렀고 또한 일설 이는 奉順大夫 檢校評書侍閤學士 都校署承으로 전한다, 배위는 군부인 음성박씨로 부는 호부사정 벼슬을 지낸 朴挺純이다. 묘는 보첩에 영동읍 양가동(영산현 가야동) 선영하라 했으나 고분이 많아 분간하기 어렵다.
작금의 종인들이 고증을 거쳐 표석이라도 세워 후손에게 전하여 치산과 봉향케 함이 급선무로 본다.

  7)영산김씨 관조 김영이
우리의 관조 김영이는 고려 충열왕23년 서기1297년에
출생하여 고려의 마지막 왕 공민왕4년 서기1355년에 하세 하니 출생지는 영동읍 금동이라 한다. 벼슬이 전객시령에 이르렀으나 고려 말에는 국내사정이 복잡다단하였으니 충열왕을 위시하여 충선 충숙 공민 제왕은 노국공주를 왕비로 맞이하여 궁내는 물론 사회풍조가 몽고 일색으로 변모하여 가므로 우라나라 고유문화는 자취를 감추고 또한 몽고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내정 간섭으로 국세가 쇠퇴하여지고 설상가상으로 媒聘使로 하여금 수 많은 처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조야의 비분과 원성이 날로 심하며 더욱 충열 충선 충숙 충혜왕 4대에 걸친 양위와 중조는 어린 아이의 장난 같았고 왕자간의 불화는 仇讐(구수)에 비할 만 하였다. 이러한 왕권 다툼으로 정치 기능이 마비되고 왕실의 기강은 극도로 문란하였으며 일반사회 또한 윤리도덕은 부패하여 간신의 내홍 내란이 망국을 자초하고 있었다. 이러한 난국을 맞이한 전객시령은 사양길로 접어드는 국운을 잡을길이 없어 맏사위 이부시랑 순천박공 元龍과 두째사위 한성부윤 구례장공 丕와 셋째사위 대제학 밀양박공 時庸과 같이 벼슬을 버리고 영동으로 낙향하여 물 좋고 공기 맑은 기산 팔경 아래에서 갈건 야복으로 매일같이 북향 4배로 여생을 보냈다. 4옹서는 이곳 산을 기산이라 부르고 물을 령수라 이름짓고 진나라 락광과 위개의 氷淸玉潤之情을 흠모하고 허유 소부를 방불케하였다. 4 옹서는 당대에 큰 선비였고 특히 전객시령은 천문지리에도 밝았으며 당대의 명유로 이름 높았다. 빙옥정 내에 4옹서의 정의를 상징하는 萬世敦睦碑를 세우고 음력 10월 1일 영산김씨와 구례장씨 종인 200여명이 시제로 봉향하고, 4성 문중이 빙옥회를 조직하여 매년 1회 화합 친목의 행사를 갖는다.

(2) 관조 이후 인물

   1) *김길원
김영이의 맏아들로 고려 충숙왕 15년(서기1328)에 태어나서 이태조5년 병자(1396)에 逝去하였다. 벼슬이 奉翊(익)大夫版圖判書에 이르렀으나 국운이 쇠퇴함에 따라 간신들의 내홍과 신돈의 혼암 친명 친원 양파의 투쟁과 이인임의 학정, 공민왕의 서숙 덕흥군과 김용의 모반, 정몽주의 살해등 잇따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지성으로 국사에 헌책하고 매사에 관여하게 되었다. 특히 홍건적 난 때 공민왕을 복주로 扈駕(호가)함에 蒙塵之苦에 공이 다대하여 영산부원군에 봉하였다. 공민왕이 薨去(훙거)하자 이인임은 우왕을 배후로 악정을 거듭함으로 길원은 이성계와 정몽주 심득부 지용기 원천석 박장등과 모의하여 왕손이 아닌 우왕을 내쫒고 정창군 瑤(요)를 세우고 이인임을 참살한 다음 그 무리를 몰아내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국을 세으니 길원은 비분을 참지 못하고 불사이군의 숭고한 정신으로 원천석 이색등과 심산유곡에 은거하니 이태조는 그의 재기와 인물됨을 아깝게 여겨 여러차례 불렀으나 불응하다 태종조에 이르러 길원의 지기를 찬양하여 특가봉군하고 증직하니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춘추관사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를 지내다 68세로 기세하니 사패지인 용산면 침봉(조산) 천곡에 초장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영동읍 산이리 산 1번지 분토곡에 배위 개성김씨와 합봉했다.
*분토곡으로 이장한 내력은 다음에 열거하겠습니다. 청산면에 살던 조진사의 횡포로 쫒겨난 이야기.

   2) 김 포(金 苞)
김영이의 둘째 아들은 苞로 삼사판관 벼슬을 했다.
그의 아들 순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자헌대부 지중추원사로 단종조에 경상감사, 세조 때에 경상감사 재임, 삼임까지했다. 단종이 영월로 귀양감에 못 마땅이 여겨 복위운동에 가담하여 동지를 모으는데 공을 세웠다.(이조실록 기록문은 생략)
순의 맏이 연수는 사온직장 벼슬, 둘째 연지는 감사, 연수의 아들 광보는 계공랑판사, 연지의 아들 愷(개)는 직제학 벼슬을 했다. 이들은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여 청산파를 이루었으며 부사공파와 생원공파의 두 갈래가 있다.

   3) 풍천당 김종경
호를 楓川堂이라하고 高麗말 恭愍王 4년(서기1355년)에 출생하여 太宗16년 丙子(1416)年 62세를 1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묘는 백화산에 있다.
定宗朝에 문과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崇祿大夫議政府右贊成에 올랐고 判義禁府事 知經筵事 春秋館事 成均館事 世子侍講院貳師 五衛都總莩總管이며 贈大匡輔國崇綠大夫議政府領議政이다.
두 아들 訓과 諒이 황희 허주 맹사성 등과 좌우보상하고 만년에 귀향하여 楓川堂을 지어 시운을 즐기고 강학하며 鄕約 수십 조를 만들어 사회 교화사업에 이바지하고 박연 박흥생 서호들을 배출하였다.
서거하자 楓溪書院에 철향하니 축문에 이르기를 間世偉人이며 聖朝名卿이라 進思啓沃하고 退務作成이라 桑鄕永世하니 爭誦徽蹟이라 하였다.

   4) 종경 형제
宗敬의 첫째동생 龍甲은 通訓大夫로 아들 簡(司直) 손자 雪雲(生員)에서 단손 된것 같고, 둘째 동생 宗德은 中訓大夫 벼슬까지 하였으나 절손, 세째동생 宗貴는 刑曺判書로 靈光派의 中始祖이다. 그 아들 誠은 主簿 벼슬을 했으며 손이 많아 `큰집이 密城君派 작은집이 唐津派 끝 집이 沃川派(希年)이다.

   5) 김 훈
  金訓의 字는 勤甫요 우왕7년(서기1381년)에 출생하여 세조19년 정사(서기1437년)에 하세하니 향년 57세이다.宗敬의 큰 아들이며 조선 초기 문학발전의 거성이었던 守省(혜각존자,신미대사) 守經(목사부윤) 守溫(문평공 영중추부사) 守和(참의공)의 부친이고 報恩派 牧使公派 瑞山派 報恩三派 尙州派에서 29갈래의 小派로 자손이 번창한 뿌리이다.
서기1399년(을묘)에 진사가 되고 태종조에 純忠效義류慶績德輔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事 藝文館事 崇文館事 春秋館事 觀象監事 世子師 永山府院君에 이르렀다. 한때는 옥구진에 병마사로 있었고 모함을 당하여 전라도로 귀양 갔다 영동으로 옮기었을때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을 떠나는대 왕에게 청하여 김훈이 몸집도 크고 병술이 뛰어난 무인이니 영동으로 내려가다가 대리고 가겠다는 허락을 받아 김훈이 가세하여 대승을 이루었고 그외에 많은 일들이 이조실록에 남아있다. 대마도 원정에 가담할 때 왕명이 없이 가는 도중에 명이 내렸기에 불충의 죄로 9족을 멸할 위기에서 수성 수온의 공적과 수완으로 죄를 사면 받고 영산부원군까지 증직 받았다는 이야기 등등...... 訓의 손(수온의 손)으로 보은파(승지공파 도사공파 지평공파) 목사공파(문의파 장수파 대덕파 황간파 옥천파) 서산파(사정공파 서산파 천파 태안파 예당파 홍천파 첨정공파 진사공파 각계파 홍성파 중군공파) 보은삼파(우정공파 중추공파) (수화의손)으로 상주파(첨정공파 우연공파 제주파) 참봉공파 통덕랑공파 대구파 청도파 청산파가 있다.

   6) 김 양
金諒은 고려 말 우왕10년 서기1384년 갑자에 출생하여 1455년 단종3년에 돌아가시었다. 태종 조에 문과에 올라 典寺少尹을 거쳐 통정대부로 병조참판에 올랐고 의검부사 오도총부도총관 벼슬을 지냈다. 괴애 김수온의 삼촌으로 만년에 관직을 버리고 강상에 청강헌을 지어 소일자락하고 시음으로 세상을 보내니 지상 선인이라 하였다한다.아버지가 형제를 두었는데 형이 훈이다. 아버지 종경이 세상을 버렸을때 풍수의 말에 이곳은 심장을 할 자리가 못되고 조금 파면 구둘장이 나오니 구둘장 위에 시신을 모셔야된다고 했다. 그러나 자식된 도리로 어찌 박장하랴 하고 더욱 더 파라고 하여 구둘장을 들은즉 그 밑에 큰 벌 세마리가 있었는데 한 마리가 휭하고 날아가니 풍수는 물론 훈과 양이 깜짝 놀라며 구둘장을 덮어놓았는데 한 마리의 벌은 오얏골에 가서 떨어졌다. 풍수는 벌이 떨어진 곳이 집터로 천하명당 이라 하여 그 곳에 집을 짓고 훈은 사형제를 두고 양은 형제를 두어 같이 살게 되었다는 구전 이야기이다. 양의 자손이 영동파로 고향을 지키고 있으며 소파로 자산파 참봉공파 봉사공파 장수파 이천 1, 2, 3, 4, 5, 6, 파가 번성하다.

   7) 乖崖 金守溫先生
옛날 조선 초에 책 읽기를 좋아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책은 다 읽고 나서 남의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는데 책 주인들은 그에게 책 빌려 주기를 꺼려했다. 일단 그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돌려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책 읽는 습성은 괴팍해서 내용을 읽고 읽어서 외게 되면 그 책장은 찢어 없애 버리는 것이었다. 남의 책을 빌려서도 한 장씩을 뜯어서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외고, 다 외면 버리니 책 한 권을 외면 한 권이, 열 권을 외면 열 권이 다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즐겨 빌려 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당시 대학자요 정치가로 널리 알려진 신숙주에게 국왕이 준 <고문선(古文選)>이라는 책이 있었다. 신숙주가 대단히 아끼고 소중히 여겨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었다. 책을 알고 온 그가 하도 간청하기에 그것을 빌려 주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가져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신숙주가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가보니 아 뿔사, 책을 한 장 한 장 뜯어서 벽에 발라 놓았는데, 그것도 연기에 그을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인가?" 신숙주가 물으니,  "내가 누워서 외우느라 그리하였네 " 하고 아주 태연하더라는 것이었다. 책을 읽음에 비장한 각오로 배수진을 쳐놓고 몰두하려는 고의 정신력이 엿보인다. 이렇게 피나는 노력을 하여 글공부를 하여 서거정, 강희맹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이가 곧 김수온(金守溫)이다. '괴애' 또는 '식우'가 그의 호인데 '식우'란 혹을 씻는다는 뜻으로 그의 목에 혹이 나서 글을 지으려면 반드시 손으로 혹을 쓰다듬는 버릇이 있어 붙여진 것이라 한다.
김수온은 1409년(태종 9)에 영동군 용산면 토용리(상용리) 오얏골에서 태어났다. 4형제 중 셋째이다. 그의 일화에??보듯이 총명하거나 명석했다기보다는 무섭도록 노력하는 사람으로 29세 1438년(세종 20)에 진사가 되고 32세에 늦깍이로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책의 인쇄와 글자 교정을 맡아하는 관직)로 있다간 곧 세종대왕의 특명으로 집현전의 학사가 되어 정인지를 비롯한 학사들과 <치평요람>을 편찬했다. 이 책은 중국역사와 우리나라 역사 중 정치 ․ 사회 ․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임금 ․ 신하 ․ 백성들에게 권장하여 경계할 것들을 추려내어 후손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 것으로 1445년(세종 27)에 완성한, 세종이 정성을 기울여 편찬한 책이다.
또한 1447년에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어 올리자 왕의 측근이었던 김수온 (金守溫)이 왕명을 받들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는 노래인 《월인천강지곡》을 짓기도 하였다.
한편 유성원 등 여러 문관․의관들과 더불어 모든 의술의 처방을 망라한 「의방유취」라 하는 의학 책을 편찬하는데 참여했다. 유학자이면서 그는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서 불경에 밝았는데, 당시 불교를 숭상했던 왕실과 인연을 맺고 조선초기 불교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기도 했으니, 37세 때인 1446년(세종28) 부사직의 관직으로 있을 때는 석가의 족보 책인 「석가보」를 다시 보완하고 수정하여 더욱 자세히 했으며, 세조 때엔 법화경․화엄경이 유교보다 훨씬 심오하다는 말까지 하면서 불교를 찬양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것은 아마도 맏형의 영향 때문인 듯하다. 그의 맏형인 수성은 집현전 학사로 있다가 불교에 조예가 깊어 마침내는 스님이 되어 승명을 '신미'라고 한 사람으로 세종․세조 등 불교를 숭상하는 왕을 도와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간행했으며, 문종 때는 '혜각존자'라는 호까지 받았다. 그래서 김수온은 스님과 얽힌 일화가 많이 전한다. 그가 영천 군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왕의 비호를 받는 어떤 스님이 자신의 세력을 믿고 여러 고을을 시끄럽게 하기도 하고 지방의 수령들을 깔보아 업신여기는 등 갖은 못된 행동을 부리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런데 마침 그 스님이 영천 고을에 왔다. 그는 넌지시 스님과 내기를 걸었다.
"나와 당신이 불교의 이치를 서로 토론하여 지는 사람은 지팡이로 마구 맞아도 때리는 사람을 원망하지 말기로 합시다." 그러자 그 스님도 선뜻 좋다고 했다. 그가 먼저 거침없이 불경을 줄줄 외며 밝은 지식과 능숙한 말솜씨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풀어놓았다. 그리고 상대방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상대방 스님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오지 않았다. 답변은커녕 그저 머리만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그의 위엄 앞에 질려 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대뜸 문창호지가 바르르 떨도록 호령을 했다. "네 이놈 늙은 중놈이 불경도 모르면서 어찌 중생의 복리를 빈다고 떠들어 댈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는 지팡이로 사정없이 때리니 그 스님은 아픔을 참지 못하고 부리나케 도망쳐 버렸다는 것이다.
세조가 그를 북경에 보내어 우리 나라에 없는 불경을 구해 오게 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가 중국 땅으로 들어가면서 하루는 '감로사'라는 절에서 자게 되었다. 그런데 이 절의 주지스님은 중국에서도 유명한 스님으로서 김수온이 조선의 큰 학자라는 말을 듣고는 미리 지필묵을 준비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절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니 벽에 묵화로 그려져 있는 매화가 보였다. .그는 곧 그 주지 스님이 준비해 둔 붓을 들어 문기둥에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조계종에서는 황매선사, 감로사는 흑매, 만약 빛깔을 가지고 본다면 반야는 아니로구나 ! "이걸 본 주지 스님이 '과연 큰 학자로구나!" 하고 놀라며 뜰 아래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극진히 대접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1451년(문종 1)에 전농시소윤이 되고 세조 대에 와서는 첨지중추원사, 성균관사예, 중추원부사, 한성부윤, 지중추원사,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특히 세조 12년엔 왕이 종신과 문무백관 100여 명을 불러 술을 내리며 즉석에서 글을 짓게 하는 이른바 임시 과거 형태인 '발영시'와 '등준시'를 보였는데 김수온이 모두 장원하여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상으로 백미 20석을 받는 등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로부터 문과와 무과의 장원에서 백미를 하사하는 관례가 비롯됐다고 한다. 그 후 호조판서를 거쳐 1468년(예종 즉위)에 보국숭록대부에 오르고, 1471년(성종 2)엔 임금을 잘 받들고 정치를 잘한 신하에게 내린 좌리공신의 4등공신이 되어 영산부원군에 올랐다.
그는 학문과 문장을 게을리하지 않아 당시의 대학자 서거정, 강희맹 등과 문명을 다투었고, 4서5경의 구결을 정하였으며 중국의 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등 국어 발전에 크게 힘썼다. 그의 저서로는 그의 호를 붙인 「식우집」이 있고, 문집으로「사리영웅기」「표적사중창기」「회암사중창기」「도성암기」「보은사중창사액기」「중은암기」「상원사중창기」「원통암정곤사중창기」「수다사상전기」「봉선사기」「원각국사비명」「낙산사범종명」「몽유도원도제문」「인성대장경발문」「상원사 권서문」등이 있으며, 그가 친필로 엮은 '복천사사적'은 후손(부용리 김수헌)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1481년 그가 73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성종은 '문평'이라는 시호와 그를 제사하는 부조묘를 내렸는데, 원래는 종곡에 있던 것을 송시열이 보은읍 지산리 선학동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유택은 영동군 용산면 한곡리에 있다.
     ♣2001年 3月 14日-2002年 1月 30日까지 國譯 栻疣集 譯刊本 出刊을 위해 會長 金東大 總務 金潤鎬가 編輯을 했고 副會長 金昌濟가 補助를 했다

   *김수온과 이조초 불교
*호국불교를 자랑한 교려의 멸망도 불교의 탓이었다면,
*척불하며 숭유정책의 기반을 닦는 국정과 숭유유신들의 억압에서도 9대 성종 대 까지 시드는 불교를 마지막 꽃피운 신미대사와 괴애 김수온 선생의 업적을 알고 길이 후세에 전하자.
*국교를 국정의 바탕으로 했던 조선 초기 불교와 유교의 과도기에서 1500년의 긴 세월 동안 백성의 정신을 닦아 온 불교문화가 새로이 잠입한 유교문화에 동화될 수 있었겠는가 김수온 선생이 이 시대에 태어나지 아니했다면
태종이나 세종대왕 같은 임금도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세종의 한글 창제로 김수온의 월인천강지곡을 시초로 한글(훈민정음)을 국민의 글로 만든 원조를 이룬 전무후무한 업적과 역경 속에서 조선 초 불교문화를 찬란히 빛낸 업적 또한 전무후무한 사실이기에 역사 속의 가장 훌륭한 인물로 높이 추앙하며 二大 業績을 자랑으로 길이 빛내고 영동 땅에 아니 전국 방방곡곡에 부각 시켜야 한다고 본다.

   *월인천강지곡 작자 정정 청원서
受 信 ; 敎育人的資源部 政策總括課 貴中
題 目 ; 金守溫 史料 點檢 資料 送付

안녕하십니까?
過重한 일을 付託들이게 되어 고맙고 한편 罪悚합니다.
日前에 말씀하신 內容을 간추려 電送하오니 參考로 하시고 時間 있으시면 耽讀하시어 저희들의 訴請을 이루어 주시도록 勞力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論註 月印千江之曲-朴炳采 著☜◈
○ p30 命副司直 金守溫 增修 釋迦譜(世宗 28年 12月)
       金守溫은 儒敎出身 學者이나 佛敎에도 造詣가 깊어 世宗大王 御命으로 釋迦譜를 찬
       述했으니 釋迦譜撰述은 實로 佛敎의 蘊蓄이 없이는 敢히 勘當하기 어려운 至難之이
       다. 讚佛歌(月印千江之曲)를 金守溫이 撰進했다는 記錄은 다음과 같다. 世宗實錄 卷
       123, 世宗 312年 3月條를 보면............................................................................................

○ p33 ............上連喪二大君 王后繼薨 悲哀感愴 因果禍福之說 遂中其隙 守溫兄 僧信眉 倡其
       妖說守溫製讚佛歌詩 以張其敎 嘗大說法會于佛堂 選工人以 守溫所製歌詩 被之管絃調..         ..............................................................................................................................................................
      위로 두분 大君이 죽고 王后도 이어 世上을 버리매 悲愴한 일은 어떤 原因이 있어
      서 그렇다하여 說敎로 타이르고 金守溫이 讚佛歌詩를 지어 法會 때 樂工들에게 그가        지은 讚佛歌詩를 管絃樂에 올려 演奏하였다.
      讚佛歌詩는 부처의 功德을 讚揚하는 노래로서 그 種類는 多樣하여 表記할 수 없고
      讚佛歌는 곧 月印千江之曲이라는 것,,,,,,,,,,,

○ p44 實錄 記事中 世宗以 治平要覽 命撰語中에
     “誠以人之於學 博覽爲難 沆於人君機政之暇 其能博覽乎 23年 6월 條
     世宗大王이 治平要覽을 지으라고 命令하는 말씀 가운데에 사람이 博覽多學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人君이 國家의 庶政을 맡아보는 사이에 어찌 能히 많은 冊을        볼 수 있으랴 하셨는데 繁多한 政務를 總括하는 사이에 尨大한 580餘首의 月印千江       之曲을 世宗大王 自身이 지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 一般 見解이다. 世宗御製 訓民이        라 한 것도 實은 集賢殿學士들이 지은 것이다.

○ p306 아래에 보면 ...........當時의 時代的 背景으로 볼 때 ............世宗의 內命을 받은 金守       溫이 엮었다는 充分한 可能性이 있는 것이다........................月印釋譜 서에 乃進賜覽 취       製讚頌命曰月印千江 云云의 기사는 月印을 世宗이 지었다는 뜻이 아니라 金守溫 이       撰進한 것을 보시고 讚頌하여 世宗이 親히 月印이라 이름한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       이다.............p307 위 原文 을 參照 하시기 바랍니다. (취라고 한 글자→ 車변에取자)

○ p309 守溫製讚佛歌詩라는 기사가 世宗實錄에 실린 來歷
○ p312 龍飛御天歌는 訓民正音 創製에 直接 關與한 集賢殿 學士들의 表記法이나 月印千江       之曲은 어디까지나 金守溫 個人의 主觀으로 編修했다는 事實
◈☞國譯 拭?集☜◈
拭疣集은 成宗의 命에 의하여 校書館에서 刊行한 것이, 現在 2卷과 4卷만이 傳해져 그 것을 合本하여 國譯 拭?集으로 엮은 것입니다. 24卷 中에는 月印千江之曲의 撰進 內容이 詳細히 記錄되어 있을 것이나 그 冊을 찾지 못함이 몹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 p44 13行 仰鴻慈之曲 發大願之曲 演甘露曲............................................................等
     贊法身 贊報身 贊化身 贊彌陀...................................................................等은 讚佛歌인
     月印千江之曲의 一部分이다.

○ p48 14行 (原文 p39 .....現如 月印江如谷答響.....)이것은 마치 하늘의 밝은 달이 江물 위에       비친 것과 같은 것이며 山에서 소리를 내면 산골짝까지 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月印千江之曲
  수양대군이 지어 올린 『釋譜詳節』을 보고 세종이 몸소 석가의 공덕을 칭송하여 지은 책이다. 모두 580여 곡의 노래로 되었는데, 3권에 나뉘어 있다. 원간은 『釋譜詳節』과 똑같은 활자로써 같은 시기인 1447년(세종 29)에 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권 상이 진기홍씨 소장으로 온전히 전하고, 권 상과 권 중의 낙장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釋譜詳節』에 끼어 전한다. 이 책이 단독으로 중간된 일은 없으나, 『월인석보』에 편입되어 간행되었다. 원간본과의 대조에 의하면, 이 때 『釋譜詳節』보다는 심하지 않으나 가사의 수정과 주석의 첨가가 행하여진 것을 보게 된다.
『月印千江之曲』은 한글로 표기된 운문으로서는 『용비어천가』 다음가는 最古의 자료다. 특히 표기에 있어서 한글 위주로 하여, 한자를 협주로 표기한 점은 최초의 예다. 또 표기에서 어원을 의식하여 어간과 복합어에서 기본형을 밝히려고 한 사실은 『용비어천가』와 이 책의 특징이다. 이러한 점으로써 『月印千江之曲』은 국어사 자료가 되지만 국문학과 서지학의 연구 자료로도 귀중하다. 원간본 권 상은 1961년 통문관에서 原尺으로 영인 되었다.

    *月印釋譜
1459년(세조 5) 간행된 석가 일대기.
소장 : 경북 영주 희방사 외 보물 제745호(11, 12권은 보물 935호). 목판본.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개고(改稿)해 합편한 책이다. 1457년(세조 3년)에 왕세자였던 도원군(桃源君)이 죽자 임금은 이를 애통히 여겨 부왕과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근 2년 동안에 걸쳐 증보(增補) 수정하여 간행하였다. 세조의 명으로 당시 편찬에 종사한 사람은 신미(信眉) ․수미(守眉) ․설준(雪竣) ․홍준(弘濬) ․효운(曉雲) ․지해(智海) ․해초(海超) ․사지(斯智) ․학열(學悅) ․학조(學祖) 등의 고승과 유학자인 김수온(金守溫) 등 11명으로, 이들은 당대의 불학(佛學)을 대표하는 선지식(善知識)들이었다. 내용은 《월인천강지곡》의 각절(各節)은 본문이 되고, 그에 해당하는 내용의 《석보상절》은 주석(註釋)같이 하여 엮어졌다.
《월인석보》 편찬은 세종 말엽에서 세조 초엽까지 양 대에 걸친 약 13년 동안에 이룩된 사업으로, 석가일대기의 결정판일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이후 제일 먼저 나온 불경언해서(佛經諺解書)이며, 당시의 글자나 말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어 국어사상(國語史上)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원본이 완전히 전하지 않아 당초 몇 권으로 되어 있었는지 명확하지 못하나, 30권 이내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전하는 것은 원간본(原刊本)과 중간본(重刊本)을 합하여 1 ․2 ․7 ․8 ․9 ․10 ․13 ․14 ․17 ․18 ․21 ․22권 등 모두 12권인데, 이 중에서 권7(崔南善 소장본), 권8(大同出版社 소장본), 권9 ․10(梁柱東 소장본), 권17 ․18(강원도 封陀寺 소장본)이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東方學硏究所)에서 《국고총간(國故叢刊)》 제5 ․6 ․7로 1956년에 영인(影印) 간행되었고, 그밖에 국어학회편 《고전선총(古典選叢)》에 권1이 영인되어 있다. 권1 ․2는 경북 영주(榮州)의 희방사(喜方寺) 소장이고, 권13 ․14 ․23은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권21은 초간본 외에 경북 안동(安東)의 경흥사판(慶興寺板)과 충남 논산(論山)의 쌍계사판(雙溪寺板) 등 2종이 있고, 권23은 낙질(落帙)하여 63장(張) 이후만 전한다. 완질(完帙)이 24권으로 알려졌으나, 95년 12월 전남 장흥 보림사에서 제25권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월인천강지곡 풀이 일부
현대어 풀이  
其一
<풀이>
높고 큰 석가불의 끝없는 공덕을 이 세상 다하도록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其二
<풀이>
부처님의 하신 일을 말씀드리니, 만 리나 떨어진 곳의 일이시나 눈에 보는 듯이 여기십시오. 부처님의 하신 말씀을 사뢰리니, 천 년 전의 말씀이시나 귀에 듣는 듯이 여기십시오.
其三
<풀이>
먼먼 전 세상에 (전생의 석가모니가) 임금자리를 버리고 불도를 닦는 정사 앞에 앉아 계셨다. 오백 명의 전 세상 원수가 나라의 공물을 훔치고 지나갔다.
其四
<풀이>
(왕은 정사에 앉아 있는 보살이) 형님인 줄 모르므로, 발자취를 밟아가서 (보살이 도둑인 줄 알고 잡아다가) 나무에 몸을 꿰어 (화살로 쏘아) 목숨을 마치게 하셨다. (보살 소구담이) 자식이 없으므로 (대구담이) 그의 피를 모아 그릇에 담아서 남녀를 태어나게 하셨다. (소구 담의 대를 감자씨가 이음)

*또 다른 전문 풀이
[其一] 높고 큰 석가모니 부처의 그지없고 가이없는 공덕을 이 세상 다 할 때까지 어찌 다         아뢰겠습니까.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아뢰고 아뢰어도 능히 다 아뢸 수가 없을 만큼 높고 크십니다)
[其二] 석가 세존의 하신 일을 말씀드릴 것이니 (우리나라에서) 만 리나 떨어진 곳 (인도에        서 일어난)의 일이지만 눈에 보는 것같이 여기소서. 석가 세존의 하신 말씀을 사뢸         것이니, 천 년 전에 하신 말씀이시지만, 귀에 듣는 듯이 여기소서.
[其三] 헤아릴 수 없는 먼먼 전 세상 시절에(한 보살이 ; 전생의 석가모니가) 임금의 자리를        버리시고 (도를 닦기 위하여) 정사(精舍)에 앉으시었습니다.
      오백 명의 전 세상 시절 원수가 (도둑으로 태어나) 나라의 공물(公物)을 훔쳐 가지고        정사 앞을 지나갔습니다.
[其 四] 왕은 정사에 앉아 있는 보살이) 형님인 줄 모르므로 (도둑의)발자취를 밟아가서 (보        살을 잡아다가) 나무에 몸을 꿰어 (화살로 쏘아) 목숨을 마치게 하시니, (보살 소구담        이) 자식이 없으므로 (대구 담이 보살의) 피를 모아 그릇에 담아서 남녀를 태어나게        하셨다.

*요점 정리
의미 : 달이 천 개의 강을 비춘다는 말로 석가모니가 중생을 교화함을 말함
  
창작 연대 : 세종 29년 (1447) 추정 ('석보상절'과 거의 같은 시기임)
간행 : 세종 31년 (1449)
작자 : 세종대왕
형식 : 악장, 서사시
내용 : 석가모니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 찬불가
용비어천가와는 달리 찬불가(讚佛歌)이므로 궁중 음악에서는 사용 안됨
상, 중, 하 3권으로 간행되었는데 이 중 상권만이 발견되었다. 수록 작품은 모두 194장이나 이로 미루어 볼 때 전편은 580여 장이 될 것으로 추측됨.
제작동기 :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 바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세종께서 보시고 이 글을 지었음(두 500여 곡으로 된 3권의 활자본. 현재 상권 1책이 보물 398호로 지정)
의의
용비어천가와 함께 대표적인 신체 악장, 최대의 서사시(敍事詩)
15세기 국어의 귀중한 자료
불교문학의 정화(精華)
표기에 한글을 위주로 하여 한자를 협주로 한 점으로써 한글전용이 행해진 최초의 문헌으로 일컬어진다
참고 : <월인천강지곡>을 세조 5년에 '석보상절(釋譜詳節)'과 합본하여 '월인석보(月印釋譜)'라는 이름으로 간행함

*이해와 감상
'월인천강지곡'의 '월인천강'은 밝은 달이 이 세상의 모든 강물에 고루 다 비친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교화(敎化)가 온 세상에 가득함을 비유한 말이다. '其一'과 '其二'는  함께 '월인천강지곡'의 서장(序章)이다.
'其一'은 '용비어천가' 제 1장처럼 형식상 파격을 가져온 장으로 설의법과 과장법을 동원하       여 끝없이 넓고 크신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였고,
'其二'는 2절 4구의 형식 을 갖추어 '용비어천가'와 같은 악장체 문학의 정형을 이루었다.        시간적․공간적으로  멀고 아득한 석가 세존의 말씀과 행적을 아뢸 것이니, 현세에서       보고 듣는 듯이 여기라는 내용이다.  
'其三'은 석가 세존이 태어나기 전 세상의 이야기로, 구담씨(瞿曇氏)의 내력을 밝힌 내용이       다. 이렇듯 '월인천강지곡'의 내용은 불교의 연(緣)을 중심으로 한 윤회 사상(輪廻思        想)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월인천강지곡'의 배경 설화  

헤아릴 수 없는 먼먼 전 세상 시절에 한 보살이 임금으로 있다가 왕위[王位]를 아우에게 맡기고, 부처의 도리를 배우러 출가하여 구담 바라문(瞿曇拍羅門)을 만나 자기의 옷[王位]을 벗고 구담의 떨어진 옷을 입고 깊은 산에 들어가 과실과 물을 잡수시고 좌선(坐禪)하시다가 자기가 다스리던 나라에 걸식(乞食) 하러 내려오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왕인 줄 몰라보고, 다만 구담의 제자라 소구담이라고 했다. 이 보살이 성밖의 사탕수수밭에 불도를 닦는 정사를 만들어 혼자 좌선하고 있었는데, 그 때에 마침 500명이나 되는 도둑 떼가 나라의 제물을 훔쳐 가지고 보살이 좌선하고 있는 정사 앞을 지나갔는데, 이들은 보살의 500세(世)전의 원수였다.

      *참고 자료
조선 세종이 1449년(세종 31)에 지은 불교 찬가(讚歌).
보물 제398호. 1447년에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어올리자 세종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여 지은 노래이다. 그러나 왕의 측근이었던 김수온(金守溫)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것이라는 이설(異說)도 있다. 《월인천강지곡》이란, 부처가 나서 교화한 자취를 칭송한 노래라는 뜻으로, 상 ․중 ․하 3권에 500여 수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아울러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한국 최고(最古)의 가사(歌詞)이다.
이 책의 표기법에 관하여 몇 가지 두드러진 점을 들어보면, ① 당시의 맞춤법은 모두 표음(表音)의 원칙, 즉 소리나는 대로 적는 원칙에 따랐다. 곧, 사ᅗ미怠,바翠(食), 머그니(食), 마가(防)… 식으로 풀이씨(用言)와 줄기(語幹)와 씨끝(語尾)과의 구분이 지켜지지 않고 표기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일이시나, 눈에, 말이시나, 일흠은, 담아, 안아, 안굼시니이다, 낮과, 곶우흰, 곶비, 맞나겝側며, 깊거다… 등으로 비교적 현대 문법과 가깝다. ② 다른 문헌이 한자(漢字)를 앞세우고 그 밑에 한글로 음을 다는 표기법을 채택하고 있음에 비하여, 이 책은 그 위치가 반대로서 한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한글을 사용하려는 주체성(主體性)의 발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③ 종성(終聲)이 없는 자리에 ᄋ을 붙이던 당시의 한자음 표기법을 볼 수 없다는 점등이다.
이는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및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 등과 함께 정음 창제 당시의 언어연구로서 빼지 못할 자료가 되지만, 《월인천강지곡》의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는 예술적인 독창성의 결여 때문에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는 못하고 있다. 《월인천강지곡》은 산일되어 상권만이 전하다가 1961년 진기홍(陳錤洪)에 의하여 발견되어 3권으로 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1962년에 통문관(通文館)과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에서 각각 영인본을 간행하였다. 또한 1995년 12월 발견된 《월인석보(月印釋譜)》 권25에 새로운 《월인천강지곡》의 시 7수가 수록되었음이 확인되었다.
        
    *不祧廟
  不遷位 祭祀의 對象이 되는 神主를 둔 祠堂을 不祧廟라 한다. 不遷位란 큰 功勳이 있는 사람으로서 神主를 묻지 않고 祠堂에 永久히 두면서 祭祀를 지내는 것이 許諾된 神位,‘不遷之位’의 줄인 말이다.
  本來 4代가 넘는 祖上의 神主는 祠堂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功勳이 있는 사람의 神位는 王의 許諾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不遷之位가 된다. 따라서 不遷之位가 된 對象은 祠堂에 繼續 두면서 忌祭祀를 지낼 수 있다. 不祧廟는 中國의 漢나라때부터 始作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不祧廟가 登場한 것은 高麗 中葉 以後 祠堂을 짓게 되면서부터이다. 不遷位가 된 神主는 처음에 墓 밑에 設置할 것을 原則으로 하였으나 宗家 近處에 祠堂을 지어둘 수 있게 됨으로서 不祧廟가 登場하게 된 것이다.
  또한 不遷位는 나라에서 定한 國不遷位와 儒林에서 發議하여 定한 儒林不遷位 惑은 私不遷位가 있는데 一般的으로 儒林不遷位 보다 國不遷位가 더 權威 있는 것으로 認定된다.
  不遷位 祭祀는 不遷位로 定해진 뒤 3年째부터 지내는 것이 原則이며 祭祀의 節次는 家門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나 忌祭祀의 節次에 準하는 것이 普通이다
  다만 不遷位 祭祀에는 地方의 儒林이나 有志들이 參與하는 境遇가 있으므로 宗孫이 주제를 하되 門中뿐만 아니라 儒林에서도 祭官이 選定된다는 점이 一般 忌祭祀와 다르다. 또 門中에 따라서는 後孫들이 祭官이 되어 辭神을 하면  儒林들이 祭祀를 지내는 場所에 들어가 再拜만 하는 境遇도 있다.

      * 金守溫 不祧廟
  가. 沿革
  報恩邑 지산리에 있는 佐理功臣 乖崖 金守溫의 不遷之位가 奉安 된 不祧廟다
  처음 報恩邑 종곡리에 建立 되었다고 傳해 오고 있으나 年代는 未詳이다. 1994年 發刊된 報恩 郡志에 1487年(成宗 18) 成宗의 命으로 종곡리 52番地에 創建 하였다고 記錄하고 있다.
  1664年(顯宗5) 尤岩 宋時烈이 종곡리로부터 現在의 位置로 移轉하고  그 紀念으로 심은 물푸래나무(揮木)가 마을 앞에 남아 있다.
  1947年에 後孫 金泰鉉이 重修하였고 1981年에 解體 補修하였다. 祠宇 建物은 正面 3칸, 側面 1칸 半 익공계 맞배지붕 木造 기와집으로 朝鮮 中期의 建築物이다. 祠宇 正面에 “不祧廟” 편액이 걸려 있고 소슬 三門이 있으며 周圍에 土石 混築 의 돌 담장을 쌓고 기와를 언젔다. 1997年 12月 7日 忠淸北道 地方記念物 第48號로 指定되었다.
*현종 13년에 송시열의 측근인 冲菴 김정(慶州)의 상현서원을 삼년산성에서 종곡리로 옮긴 것과 괴애 김수온의 부조묘를 종곡리에서 지산리로 옮긴 것과의 관계를 어덯게 생각할까?
  
   8) 慧覺尊者 金守省(信眉大師)
守省은 金訓의 長子로 西記 1403年(朝鮮 太宗3年 癸未)에 태어났다. 始祖 金令貽가 高祖, 金吉元이 曾祖, 金宗敬이 祖父이시다. 태어날 때부터 왼손 손바닥에 임금 王字가 손금에 있어 父母와 三寸들은 크나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新羅때부터 李朝에 이르는 동안 그런 사람은 나라에 逆賊이 된다하여 國法에 의해 잡아 죽였기 때문에 죽음을 免하려고 배안 병신 노릇을 하느라 항상 손가락을 오그리고 주먹을 쥐고 살았던 것이다.
*용산 오야골(지금의 고야골-상용리 안 골짝)에 이를 뒷밭침 하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조선 태종 임금 때에 천기를 보는 역관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저 남쪽 하늘 아래에 커다란 인물이 태어나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 아이를 그냥 두면 전하에게 큰 화근이 될 것이 틀림없으니 지금 바로 처리하심이 마땅합니다"하고 " 지금 그 인물이 그 곳에 있으면 화근이요 만약 집을 떠나 중이 되었으면 전하께 도움이 될 인물이 될 것입니다"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이 그냥 있을리 없다. 이름 있는 자객을 불러 즉시 남쪽으로 보내며 "만약 중이 되었거든 그냥 오너라"했다 한다. 왕명을 받은 자객이 남쪽으로 내려 오며 골짝 골짝을 샅샅히 뒤지면서 용산 땅에 와서 고얏골을 찾은 것이다. 그 때 이 아이(수성 신미) 는 이러한 위기를 미리 알아 30리 밖 백화산 넘어 반야사에 출가하여 이미 중이 되어 있었다 한다. 이 전설의 주인공이 바로 신미대사가 아니겠는가.
수성은 어려서부터 인물이 잘 나고 평소에 말을 잘 하지 않았으나 한번 말을 내 놓으면 청산 유수 같았고 , 눈을 부릅뜨면 안광에 기가 꺾여지지 않는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의 기품이 있어 관상학적으로 왕의 기상을 타고났다고 하니 총명함이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는데 글을 배우고 익혀 집현전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벼슬에 마음이 없고 불가에 뜻이 있어 자칭 信眉라하여 머리 깎고 중이 되었다. 세종 26년에 다섯째 왕자 광평대군을 잃고, 27년에 또 일곱째 왕자 평원대군을 잃으니 비통함을 달랠 길이 없는 세종에게 28년에 왕비 소헌왕후가 승하함에 슬픔이 더욱 크셨다. 3년간에 세분을 잃으니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을 뉘우치던 중 병환으로 고통을 받을때 문종과 수양대군 등이 지성으로 시탕 하였으나 효력이 없던 바 신미로 하여금 약을 쓰니 快差하였다. 그로부터 세종은 信眉(秀庵)와 가까워졌고, 신미의 박식함에 감탄하고 인물됨에 惑하여 信眉에게 慧覺尊者의 號를 내리려 하였으나 병으로 내리지 못했던 것을 문종에게 諭敎를 내리니 문종은 선왕의 뜻을 받드러 왕에 오르자 賜號하니 禪敎宗 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佑國利世圓融無애 慧覺尊者라 했다. 특히 세조와는 수양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세조는 등극 후에도 꼭 존자라 칭하였고 국사로 모셨으며 세조 7년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신미를 우두머리로 효령대군과 김수온에게 불서를 언해하고 간행함이 100 여종에 이르렀다. 복천사를 비롯 오대산 상원사, 월정사, 락산사, 대자암등을 중건하고 국책으로 척불정책을 함에도 소신 것 불사에 힘썼으니 그 공이 지대하였다. 성종 10년 이후 涅槃에 오르니 보은 속리산 복천사(福泉菴) 남쪽 200m 지점에 秀庵 부도를 세웠으니 충청북도문화재 12호이다.  *복천암 사적비에 《훈민정음(한글) 창제시에 세종께서 신미대사를 집현전으로 불러 학자들에게 인도의 범어인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고 자문하여 훈민정음의 자형을 취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니 세계에서 으뜸이라는 우리 한글 창제에 큰 역할을 담당한 영동의 인물 신미대사의 얼이 담겨 있음을 큰 자랑으로 널리 알려야 되겠다.
*오대산 『상원사 중창 勸善文』은 國寶 292 號로 지정되어 신미(守省)와 괴애(守溫) 형제의 업적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그 외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으니 다음으로 이어지겠다.         *권선문 별지 참조

     * 첫번째 이야기
朝鮮朝 第7代 世祖大王은 國初의 庶政을 바로 잡고 萬機를 親裁하기에 편안한 날이 없는 사이에 몸에는 지독한 피부병에 걸려 백방으로 손을 섰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보위에 오르기 위하여 여러 형제와 나이 어린 조카 단종을 해치고 어진 신하들을 학살한 세조는 만년에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회오의 길로 침잠하니 외로움과 허전함에서 정신적인 안식처를 구하려 하였다. 이때 생각난 이가 慧覺尊者 信眉大師였다. 신미는 도학과 학식이 뛰어난 당대의 학승으로서 福泉寺에 住錫하고 있었다. 신미대사의 초청을 받은 세조대왕은 천순8년 2월 28일 신숙주 이하 신하를 대동하고 청주에서 2박을 하고 장재리를 거쳐 말티재를 넘어 큰 소나무 아래까지 당도했다. 바로 길옆에는 이등변 삼각형의 아름드리 낙낙 장송이 가지를 길 위에 드리우고 있어서 대왕이 탄 연의 꼭지가 아마도 걸릴 것만 같았다. 이때 대왕은 연 위에서 손으로 소나무 가지를 가리키며 "아! 저 가지, 아! 저 가지" 이렇게 외치자 그 순간 늘어진 가지가 위로 슬그머니 쳐들었다 한다. 대왕은 신통히 여겨 즉석에서 正2品의 벼슬을 내리었다. 그래서 이 소나무를 正二品松이라하고 보물로 보호한다. 정이품송을 지나 복천사에 行幸한 세조대왕은 신미대사가 主宰하는 法會에 의지하여 티끌 많은 세상에 물든 자신의 심신이 부끄러움을 깨닫고 또 한편으로는 무한한 법열을 느꼈다. 이는 신미대사의 무변의 법력과 도심으로 濟度한 까닭이다. 세조대왕과 신미대사와는 水魚之交로서 평생을 은혜롭게 지냈다. 복천사서 법회를 마치고 아쉽게도 떠날 무렵 신미대사는 세조대왕에게 청원하기를 江原道 五坮山 上院寺에는 부처님(석가여래) 頂骨 舍利를 모신 寂滅寶宮이 있는데 歲久月深하여 심히 퇴락 하여 민망한 지경에 있으니 대왕께서 보궁을 중수하시면 그 공덕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간청하니 세조는 쾌히 승낙하였다. 이에 바로 學悅스님을 상원사로 보내어 중수를 마쳤고 6월에 낙성식을 가졌는데 이때 신미대사는 상원사에서 세조대왕을 초청하였다. 때는 5,6월 염천이라 날씨가 찌는 듯 하였고 대왕의 온 몸은 피부병이 더욱 악화되어 고통이 심했다. 그래서 신미가 대왕을 초청한 것이다. 낙성식에서 온 종일 땀을 흘린 대왕은 밤이 되자 절에서 마련한 목욕장에 들어가 몸을 씻는데 옥 같은 석간수에 들어가니 전신이 녹아 내릴 것 같이 시원하였다. 그리고 나이 어린 동자가 느닷없이 나타나 고운 두 손으로 등을 문지르니 심신이 날아갈듯 개운하고 시원했다. 더욱 고마운 것은 나이 어린 동자였다. 그래서 대왕은 등뒤에 있는 동자에게 나즉이 말을 건넸다. "얘 동자야! 너 어디에 사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고맙긴요. 저는 이 절에 살고 있어요. 대왕님" "아 그래 ,내가 너에게 부탁할게 있는데 들어 주겠나?" "예 대왕닌, 어느 존전 이라고 대왕님의 부탁을 마다하겠습니까? 무엇인지 하교하옵소서 대왕님!" "참으로 기특하구나 나의 부탁은 다름이 아니고 나의 몸에 손을 댔단 말을 남에게 절대로 하지 말라는 부탁이다" 세조대왕의 이 말은 중대한 뜻이 있다. 신하된 자가 옥체에 손을 대면 극형에 처하는 법이 있기에 동자의 신상이 염려되어 한 말이다. 그러자 동자는 대왕을 향하여 저도 대왕께 청이 있으니 꼭 들어 달라고 한다. 세조대왕은 나이도 어리고 조그만 놈이 청이 있단 말이 귀엽고 앙증스러워서 너의 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동자는 태연히 하는 말이 "대왕께서는 文殊菩薩이 現身하여 등을 문질렀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마세요. 꼭 약속이요" 하였다. 대왕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동자는 온데간데없어 기이하게 생각했고 피부병은 이때부터 치유가 되었다한다. 세조대왕은 신미대사의 도 력에 힘입어 복천사에서는 마음의 병이 치유되고 상원사에서는 육신의 병이 치유되었다. 지금도 상원사에는 세조대왕이 목욕했던 당시 현신 했던 문수보살의 상이 잘 모셔져있다.

       * 두번째 이야기 信眉大師의 慈悲와 道力
報恩하면 俗離山이요 俗離山에는 法住寺가 있고 有名한 菴子 福泉庵이 있다. 옛부터 법주사에는 고명한 스님들이 住錫하였기에 이 절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慧覺尊者 信眉大師가 한때 이 절에 住錫하며 面壁觀心으로 불도에 정진하고 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겨울날 밤에 이 절의 중진급 3,4명이 헐레벌떡 정신 없이 뛰어와 신미대사 수도장의 문을 두드리고 뵙기를 청하였다. 내용인즉 이러하다. 도둑 20 여명이 벌떼같이 절에 침입하여 젊은 중들을 묶어 놓고 장차 창고를 털 기세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높은 스님 信眉大師의 지시를 받으러 온 것이다. 이 놀랍고 끔찍한 말을 전한 스님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말도 제대로 못했다. 이런 뜻밖의 일을 당한 신미대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태연히 말을 했다. "이 칠칠찮은 것들 떨기는 왜 떨어, 도둑이 떨 일이지 주인이 왜 떠느냐?"하고 꾸짖고는 명령을 내렸다. "모든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해라"하였다. 이 절에는 토지가 많아서 일년에 천여석의 곡식을 수확 할뿐 아니라 비단과 무명, 기명 잡화가 창고에 가득했었다. 이 말을 들은 도둑들은 마음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쌀과 비단 기명 무명 등 닥치는대로 멜빵이 끊어지도록 힘껏 짊어지고 도망을 쳤다. 긴긴 겨울밤이 뽀얗게 새도록 구슬땀을 흘리며 도망을 쳤는데 이게 웬 말인가, 밤새도록 죽을힘을 다하여 도망을 쳤건만 법주사 경내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밤새도록 법주사만 뺑뺑 돈 셈이다. 신미대사의 도 력에 잡힌 것이다. 이에 놀라고 당황한 도둑 떼들은 겁에 질려 솜같이 나른한 몸을 이끌고 신미대사 앞에 무릎 꿇고 살려달라 애원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신미대사는 태연히 도둑 떼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너희들의 눈을 보니 모두 착한 사람이다.
이 순간이라도 사악한 마음을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왜들 이러느냐 마음을 바로 잡도록 하여라"라고 타 일렀다한다. 도둑들은 대사의 말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 앞에 회개하였다한다.

       * 세번째 이야기
*삶은 달걀로...병아리를, 부적으로 100리 밖의 불을? 신미대사의 참 모습을 세속에 물든 범속한 사람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名門大家에 태어나 탄탄한 벼슬길에서 순풍에 돛단배처럼 순항을 하던 金守省(信眉大師의 俗名)이 어찌하여 화려한 벼슬자리를 버리고 불도에 들어갔는지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분의 高祖는 高麗朝 末의 典客寺令 金令貽(永山金氏 始祖)이요, 曾祖는 版圖判書 永山府院君 金吉元이며 祖父는 贊成公 金宗敬이고 父는 太宗朝의 輔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贈領議政이다. 叔父는 兵曹參判이다.
金守省 자신은 深奧한 학문의 온축이 있어 학계의 泰斗로서 집현전에서 世宗大王의 총애를 받고 日就月將하던 그가 왜 불문에 입도 하여 승려가 되었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고 불가에서 말한바 불제자가 되기란 오랜 전세에 積德이 있어야 한다지만 .........하여튼 金守省은 불도에 입문하여 信眉라 개명하고 面璧觀心으로 深奧한 진리를 탐구한 그는 稀代의 學僧이요 道僧이란 칭송을 받고있다. 집현전 학사라면 당시의 쟁쟁한 학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도학 또한 그러하였다. 그리고 신미대사가 언제 관계에서 손을 떼고 불문에 입도 했는지 그 년대도 미상이다. 집현전학사에서 사퇴하고 불도에 입문했다면 일생의 운명이 좌우되는 중대사인데 그럴만한 사연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다. 문제의 정답은 본인이 쥐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만 추측이 가능한 것은 집현전 학사에서 사퇴하고 불도에 입문했다면 연령이 30세쯤 되었을 것이고 일반적인 풍속이나 가정의 가풍으로 보아 이미 결혼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신미대사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로 많은 문제를 남긴다. 세조대왕의 한글 창제에 관여했다고도 하고 그의 아우 괴애 수온선생이 月印千江之曲을 지을   많은 협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도 전해진다. 이상의 의문들은 더 연구해서 규명하기로 하고 信眉大師가 白華山 너머의 般若寺에 주석했을때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한다.
般若寺는 용산면 상용리 고얏골(자택-오얏골)에서 약 30리 정도 떨어진 백화산 너머에 있는 신라때 창건한 고찰이다. 이때 생가에서는 반야사에 계시는 신미대사가 딱하고 안스러워서 겨울이 되면 새 솜옷을 지어서 보내기도 하고 계절 따라 신선한 과일과 맛있는 음식을 보내기도 했다. 집에서는 대사의 환속을 간절히 바랐지만 반석 같은 그 큰 뜻을 돌릴 수가 없었다. 뱁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리요.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하루는 늘 하던 대로 의복과 과일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생가에서 돌쇄(집에서 부리는 종)가 문안을 갔었다. 가지고 간 음식 중에는 송편이 있었는데 이 송편 속에는 팥고물 대신 계란의 노른자위를 이겨 넣어서 감쪽같이 빚었기  때문에 이 비밀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하면 중은 고기를 안먹기 때문에 송편으로 속여서 노른자위(고기)를 먹이고 파계시켜 환속을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어머님이 환속을 바랐으면 이렇게까지 했겠는가. 돌쇄는 가지간 송편을 쟁반에 맵시 있게 담아서 대사께 바쳤다. 대사는 말없이 송편 하나를 손바닥 위에 놓고 살살 문질렀다. 아! 이게 웬 일인가? 손바닥 위에 놓인 송편이 터지면서 노란 병아리가 삐약삐약 하며 나왔다. 참으로 대사의 도술은 대단했다. 대사는 이 후에도 면벽관심의 공적을 쌓아 마음의 눈으로 奧旨를 心解大惺하여 중생의 心田을 啓導하고 힘써 濟度했다고한다
대사께서 반야사에 주석 하실 때 또 이런 일이 있었다. 대사는 원래 蘊蓄이 풍부하여 천문과 지리에도 통달하였다. 하루는 저녁 후 앞뜰에 나서서 天氣를 살피니 報恩 俗離山 法住寺에 화기가 있어 위태로움을 보고 급히 주문을 외웠다. 이때 법주사에서는 수 백 명의 슬려가 한창 법회를 열고 강론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벼란간 난데없이 일진 강풍이 일어나 문짝을 두들기고 휑하게 지나가면서 한 장의 종이쪽지를 떨어뜨렸다. 승려들은 의아하여 그 종이쪽을 주워 보았다. 그 종이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었다. 귀사 지붕에 불이 붙었으니 빨리 잡으라는 간단한 한마디의 글이 적혀 있었다. 승려들은 황급하여 나가보니 강당 처마 끝에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이것을 본 승려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허둥지둥 아비규환이었고 불은 번져만 갔다.
이 광경을 관심으로 심찰한 대사는 "저런! 저런!" 이렇게 두어 마디 되 뇌이고 급히 부엌에 들어가 물종구라기로 물을 떠서 두어 방울 법주사를 향해 튕겼다. 이때 법주사에서는 때아닌 폭우가 쏟아져서 불길을 잡았다고 한다. 大師는 學僧이자 道僧이었다. 그러므로 세종대왕의 신임과 총애가 두터웠고 문종과 세조의 왕사로서 교화사업에 큰공을 세웠다.
출가 후 개명은 信眉 또는 如達 또는 秀庵(복천암에는 수암이라 썼다) 이라고 했고 世宗의 遺敎로 문종이 등극하자 "禪敎宗 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佑國利世 圓融無애(石변에 疑자) 慧覺尊者"(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라는 불교 최고의 존호를 내렸다. 신미대사는 억불숭유 하는 조선 국초의 유교 가문에 태어나 왕실과 손잡고 편협한 유학자들의 박해를 받아가며 불교 부흥에 노력했다. 한편 刊經都監을 주재하며 많은 불서를 국역했으니 우리 국어 발전에도 지대한 공을 남겼다.

   9) 金守經(김수경)
신미의 아우로서 성주 목사를 거쳐 한성부윤을 지냈고 노직에 보은 군수로 여생을 마치었으니 슬하에 아들이 없어 한이 되더니 기세(棄世)후 황간면 용암리 가리령에 안장하고 사위인 이위(李偉-慶州李氏)의 후손이 해마다 묘제를 지내왔으나 그 또한 절손이 되자 이씨의 외손인 海平尹氏 은정(殷丁)의 후손이 지금까지 10월 13일에 시제를 올리고 있으니 고금을 통해 보기 힘든 미사라 하겠다.
  
10) 金守和(김수화)
신미의 아우로서 문과에 등제하여 통정대부공조참의를 지냈으며 묘는 용산면 한곡리 천관산하 형 김수온의 묘 뒤편 200m 지점에 비석 상석 문관석이 있다.

11) 金得精(김득정)
  관조의 5세손으로 영동파의 맏집으로 자산파를 이루고 양(諒)의 장자이며 통훈대부 해미 현감을 지냈다. 1473년(성종 14년) 이시애 난에 호종(扈從)한 공으로 비지(碑地)를 하사 받고 용산면 금곡리 뒷산에 정자를 세우고 조부 풍천당의 향약을 전승 개몽하여 순풍미속을 이루었다. 묘는 금곡리에 상석과 문인석이 있다.

12) 金得煥(김득환)
  득정의 아우로 통훈대부현감(通訓大夫縣監)을 지냈으며 묘는 용산면 청화리에 있고, 아들 朝奉大夫兵曹正朗(조봉대부병조정랑) 계성(繼成-묘는 용산면 청화리)의 장자 준(埈-묘는 용산면 율리 신목)이 참봉공파 (參奉公派) 派祖이고 차자 언(堰)이 봉사공파(奉事公派-묘는 용산면 상용리 버드니)로 셋째 증손 중거(重鐻-묘는 용산면 산저리 예막산)가 통훈대부이천부사(通訓大夫伊川府使)로 인조 조에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쌍수산성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扈從)한 공적이 있으며 6형제를 두었으니 이천(伊川) 1派에서 6派까지 자손이 가장 번성하다.

13) 임진왜란 공신
   김종려(金宗麗)-연의 손자로 광주판관 재임시 임진왜란의 장재를 인정받아 광주목사를 제수 받아 고경명과 더불어 창의(倡義) 조방장으로 33인을 인솔하고 담양산성을 고수하여 적병을 물리쳤다. (광주창의비에 기록)
묘는 용산면 상용리 버드니 선고 묘 아래 삼쌍봉이다.
   김중기(金重器)-종려의 장자로 임진왜란 때 호남의 사림 백 여명을 이끌고 의거하여 적병을 토벌한 사실이 장성창의비에 기록되어 있다.
   김광철(金光澈)-관조 16세손으로 호는 용강이다. 상주파로 1760년 庚辰보(4권)를 간행한 유공자이다. (최초의 족보-숙종 10년 갑자보 후 76년째 만든 족보가 경진보이다)

(3) 근대 인물
   1) 3․1 독립 운동가
         김철(金澈)-관조의 24세손으로 영광인이며 자는 성채이요 호는 일강으로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 재무부장 군무부장을 역임 일황 저격 백천대장 폭파 양대 의거에 직접 참가했고 조국광복운동에 일생을 바쳐 망명길에 중국 항주에서 48세를 일기로 장서(長逝)하니 항주악왕조 뒷산에 안장되어 있으나 광복된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으나 정부에서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하고 영광 군수와 함평 군수의 지원으로 고향 땅 구봉산 기슭에 영모비를 세우고 영모사를 지어 성역화 하여 추모제를 지낸다고 한다.

   2) 효행자-金柱臣(伊川派-잉魚) 金光河(奉事公派-親患-범,現夢) 金                錫大(奉事派-九村里에 孝行碑) *諒(兵曹參判公)의 玄孫                女(星主李氏- 李璋의 妻)

(4) 현대 인물
   1) 정치계 - 김성호(16대 국회의원)
   2) 법조계 - 김용헌(대전고법부장판사) 김옥봉 김기문(변호사)
               김춘호(대전지방검찰청 사건계장)
   3) 재  계 - 김재환( 회사 대표)  
   4) 의료계 - 김 혁  김기봉
   5) 학  계 - 김창헌(경북대 교수) 김기영(부산의대 교수)

5. 영산김씨 연원과 세계(소파)
영산김씨 선원 및 세계와 보은파(승지공, 도사공, 지평공), 목사공파(문의, 장수,대덕,사정공,황간,옥천), 서산파(해미,온양,면천,해미,태안,예당,도동,홍주,첨정공,진사공,각계,홍성,중군공), 보은 3파(운정공,중추공), 상주파(첨정공,처사공,우연공,제주,참봉공,통덕랑공,대구,청도,청산,청산), 영동파(자산,참봉공,참사공,장수,이천1,2,3,4,5,6), 영광파(밀성군,당진,옥천), 청산파(부사공,황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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