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든 몸으로든 무언가를 그린다는 건 가장 원초적인 행위 중 하나다. 문자가 있기 훨씬 전부터 인류는 그려왔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부연 설명 없이도 감정의 공유가 가능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느끼고 본 것을 표현하고, 그것을 나와 취향을 같이하는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지니는 가장 순수한 이상향의 한 형태인 것이다.
interviewee 작가 김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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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 그려지고 하고,
현실이 그려지기도 한다
안녕하세요. 영채 작가님.
안녕하세요. 저는 88년생, 올해로 스물아홉이 된 김영채라고 합니다. 손으로든 몸으로든 무언가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있습니다.
‘거주식’ 여행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사실 여행이라기보다는 다른 곳으로 옮겨가 보고 싶었던 거예요. 일상을 다른 곳에서 보낸다고 해야 하나.
살아보니 어때요?
파리에 가서는 독채를 빌려 집에서 나가지도 않고, 그림 그리고 일기 쓰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았어요. 자다가 깨면 수첩 꺼내서 꿈을 그리기도 하고. 아무래도 생활을 목적으로 간 것인 만큼 시선도 좀 더 자연스러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확실히 여러 가지 시도도 많이 했고, 배운 것도, 느낀 것도 많았던 시기였어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취향을 걸러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고. 사실 한국에선 해야 할 것도, 신경 써야 할 것도 많고 하다 보니 마음 편히 생각할 시간조차 부족했거든요.
작가님의 그림은 유독 삐뚤삐뚤하면서도 간결한 느낌이 있어 좋아요.
(웃음)감사합니다. 드로잉을 좋아하게 된 건 선의 강약과 색의 오묘한 차이들로 미세한 감정과 기억을 담아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예요. 많은 순간 고요함과 침묵이 주는 깊이에 대해 생각하곤 하는데, 드로잉이 제게 있어서 그런 의미인 것 같아요. 적은 선과 색은 항상 더 넓고 깊은 시간을 담아요. 이를테면 ‘여백의 미’와 같은. 누구든 그 안을 채우는 건 각자에게 달린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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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누구에게나
새로운 욕구를 가져다주는 것
다녀오셔서 많은 게 변했겠어요.
여행이 좋은 게, 돌아오면 하고 싶은 게 막 생기는 거예요(웃음). 분명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생활환경은 여전히 현실적이고 단조롭고 그야말로 달라진 게 없는데, 마음이 달라지니 정말 신기하게도 단기간 안에 해오던 작업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어요. 그전까진 그렇게 나가지 않던 진도였거든요(웃음). 이전까지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다면 여행을 다녀오고 나선 좀 더 주체적으로 저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게 미래든 성향이든 취향이든. 여행은 누구에게나 새로운 욕구를 가져다주는 거니까.
이후로도 여행을 다니셨나요?
네, 한국에서 살다 보니 또 다시 정해진 현실의 틀에 저를 맞추어야 하는 삶이 또 고개를 슬금슬금 들더라고요(웃음).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따로 있는데 남이 더 잘 하는 일에 굳이 내가 애쓰게 되는? 그러다 보니 또 숨이 막히고, 거기서 벗어나고자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던 거 같아요.
주변 사람들 반응은 어땠어요?
물론 저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봐준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실 그 후로도 거주식 여행을 종종 다녔기에 누군가에겐 방황하는 것처럼 비춰진 적도 있었어요. 부모님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이 저를 많이 걱정스럽게 보시더라고요. 처음에는 ‘나도 내방식대로 열심히 해나가고 있는 건데 왜 방황하는 것으로만 보지?’라는 생각이 짙었는데, 어느 순간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가족이든 남자친구든 친구든 모두 제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인데, 나만 좋으면 이게 진짜 의미가 있을까 싶은.
근데 지금은 또 제주에 머무시게 됐네요(웃음).
(웃음)미안한 마음 역시 컸지만, 제가 무언가를 경험해보고자 했던 마음이 좀 더 컸던 것 같아요. 하지만 예전처럼 뜬구름 잡기는 아닌 것이 지금은 나름의 계획도 정해두었고, 오롯이 저를 바라보는 시간에 집중하며 하루하루 공들여 살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도 이젠 믿고 바라봐주시고요. 또 지역이 지역인 만큼 ‘삶이 작업이 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목적을 먼저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았다면, 지금은 제가 보는 장면이 자연스레 그림으로 옮겨지는 순서가 된 것 같아요. 물론 예쁜 제주에 살다 보니 그리고 싶은 장면이 더 많아지기도 했고요(웃음). 여기는 오래된 것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그게 좋아요. 외국은 보통 건물이든 뭐든 다 살려두잖아요. 근데 우리나라는 조금만 낡으면 금세 새것으로 바꾸려 하니 아쉬워요.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그리워질 것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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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타카(Trataka)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요즘 저의 일상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요가예요. 몸으로 그리는 것 역시 좋아해 왔던 터라,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던 것 같아요. 요가를 하며 삶의 전반적인 것에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이를테면 내 몸 어디가 안 좋은지, 그렇다면 어떤 운동이 필요한지, 어떤 음식을 먹어야 좋을지, 그 음식들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와 같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명과 자연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 거죠. 처음엔 저도 환경운동, 생명운동 하시는 분들이 이해가 안 갔는데, 자연스럽게 접하다 보니 거부감 없이 이해하게 되었어요. 기부도 똑같아요. 돈 많은 사람만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건 마음이고 목소리였어요. 그렇게 주변 사람들이 하는 걸 보면서 조금씩 배워나가는 중이에요.
특히 요즘은 ‘트라타카(Trataka)’라는 이름으로 요가와 자연에 대해 알리고자 머리를 싸매고 있어요. 목소리를 크게 내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겠다!’라기보다는 ‘하면 좋으니 같이 해요’에 가까워요. 저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해요.
the bom volume 05 <Classic Summer> '선으로만 그린 그림' 중에서
글 라어진 / 사진 김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