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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라넷

자유롭게 피어나기...
김가네2019.02.14 22:54

永山金氏宗親會에 로그인 않는 자유게시판이나 芳名錄을 만들어야 여기 글들을 올릴수가 있습니다.  

남의 조상을  내 조상이라고  하면  어불성설 입니다.영김측에서 찾아보아야할 선계로 仁宗婦人 선평왕후 동생金貽永(父金璿,)本貫입니다,

:萬姓大同譜蘊州金氏編(始祖金就谇-大成-汝砥-善鳴-泰鎰-珍蘊-德正:嘉靖時立濟州  失其傳 (嘉靖)年間中宗 17(1522))이 있으나 다른곳은 나오지 않듯이 말입니다. 連絡杜絶 絶孫으로 버려진 祖上들이 많습니다.

한반도에선 통일신라시대까지 성씨만 쓰다가 고려시대가 되면서 지방에 해당하는 본관(本貫)’제도를 도입했다.

애초 본관은 곧 같은 성씨가 모여 사는 씨족 거주지를 뜻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들어 한양 등 대처로 인구 이동이 많아지면서 본관이 일평생 한 번도 못 가본 지역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선계찾기로 아래와 같이 신중하게 접근하면서 밝혀내야겠습니다.

永山金氏先系 神武王-金益光-金瓚-金正-金文蔚-金信規-金浩晙-金令器- 金先錫-金殿邦-金錫符-金誠-金大齡-金仁旦-金純-金季鳳-金莘尹-金純永-金慶夫-金得鈞-金允珍-金仁榮-金庚信-金令貽-吉元(恭愍王版圖判書),

小伽耶國 時代遺物 '고인돌'이 자리잡고 있는 新羅王子들이 黃山津口(金海 ;駕洛 - 小伽耶(固城) 洛東江下流로써 梁山金海사이:高麗時代 許麒辛旽을 탄핵했다가 統營 竹島歸養歷史가 있듯이) 永山金令貽公께서 固城金氏之祖先代祖有關하다,新羅王族後裔:金敬元-金公諒/金公立(兄弟)-金忠義(806-820:金忠儀 新羅人德宗朝官將軍)-金原得 김씨 부인은 864년에 죽었고, 그 때의 나이가 32살이니 832년에 태어난 것이다.舍利函記, 善德女王 15黃龍寺 9木塔文聖王代 기울어져 景文王 11(871) 金魏弘(경문왕의 아우 )最高 責任者로 새로고쳐 다음해 7월에 完工, 이때 大舍 金公立이 탑의 重修工事參與했다는 事實紀錄,

金宗敬 先祖高麗靖宗朝 文科及第事實이 아닙니다 즉高麗靖宗朝文科 及第者 名單에 없습니다.

김길원(金吉元)의 아들 김종경(金宗敬)定宗(고려정종시대가 아닌 조선정종조) 춘추관(春秋館:시정의 기록을 맡아본 관아)과 성균관(成均館:유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의 벼슬을 역임한 후 도총관(都摠管:오위도총부의 정2)에 올랐다.

永同邑縣誌 총묘(塚墓) 항목 인물(人物) 항목에 영산군(永山君) 김길원(金吉元), 고려 때 조정에 공을 세워 영산군(永山君)에 봉해진 뒤 토성(土姓)이 됐다.“永同縣邑誌”(영동현읍지 1999년 간행) 다음과...태종 13(1413) 右贊成 金宗敬이 창건한 강학당으로 그의 호를 따라 楓川堂이라 하였다백성의 고통을 조사하게 하다. 김훈·윤흥부 등을 외방 종편시키다

下旨義禁府曰: “永同付處金訓羅州付處尹興阜原州付處康有信沃川定屬朴安守, 皆令外方從便, 權堡李法華黔同李弘, 家産還給김훈을 영동의 농사에 안치하다. 아들 김여달이 신정한 까닭이다

安置金訓于永同農舍 訓子如達申呈云:"大父宗敬年老在永同" 故也

, 金訓配役遠裔, 其父宗敬申訴, 命外方從便左獻納安修己啓: "訓之罪, 不可輕赦, 今許外方從便如欲父子同處, 則請移定其父所住永同官奴" 上曰: "太宗朝, 已令從便, 其後定役, 非訓之罪也己亥東征時, 太宗降旨, 募赴征者, 訓之妻兄李迹薦訓於李從茂 使赴東征之役故也" 修己再啓曰: "雖移定其父所居官奴, 亦是過蒙上恩也" 上曰: "訓之往者從便, 固此罪也, 今者從便, 亦此罪也 旣許從便, 以悅老父,予當不從

뿌리찾기는 高麗史墓誌銘,각종 김씨古書類외에는 찾기가 매우 힙듭니다. “독립운동의 역사, 김철 없이는 논할수 없다함평 출신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의 생애신광면 천석꾼지주 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 헌신재산 정리 상해3·1 운동 손병희와 중추적 역할임시정부 수립 큰 기여김구·안창호 등과 독립운동윤봉길 의거’·군무장 맡아 동분서주 과로로 순국 기념관 바로 뒤에는 일강 김철의 가묘와 두 부인의 묘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

후손 김만선씨는 영산 김씨 문중이 조부(김철)의 유골을 찾으러 항주에 갔으나 재개발이 이뤄져 묘지 주변 흙으로 가묘를 세웠다면서 문중에서는 조부의 첫번째 부인의 친정을 찾으러 함평 근방을 다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일제에 의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회상했다.오랜 시간이 지난 1975, 그의 고향인 함평과 그가 공부했던 영광군의 경계에 지자체에 의해 숭모비가 건립됐지만, 그의 업적이 알려진 것은 기념관이 세워진 2000년대 초반부터다.김씨는 독립운동에 대한 조부의 업적은 최근에서야 알려졌다. 서거하신 뒤 독립까지 10여년의 공백에 존재가 잊혀져 갔다면서 이제라도 임시정부 복원청사와 기념관을 통해 조부의 숭고한 애국혼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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